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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승리,
젊은 작가들의 역설적 사진실천 |
강수미
미학, 미술비평.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
“다시 읽기를 실패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를 읽을 수밖에 없다.” 1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의 과학학사원에서 물리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라고(François Arago)가, 이미지의 역사에서 소위 ‘신생아’에 속할 사진술의 탄생을 공표했다. 이후 그 이미지세계의 갓난아이는 서구 근대사회의 물질적 · 과학기술적 · 경제적 진보와 함께 성장하면서, 한갓 ‘시각이미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켜나가는 데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매체’로서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 진보 또는 성장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2010년 지금 시점에서 지난 170여 년에 걸친 사진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대체로 그 ‘이미지의 신생아’가 커다란 실패나 몰락 없이 인간의 문명사에서 승승장구해, 이제는 간단히 도발하기 어려운 ‘거인’이 됐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요컨대 사진은 현실세계와 이미지 영역을 통틀어 승리의 가도를 달려왔다는 말이다. 때로 그 승리는 사진의 객관적 기록성과 재현방식의 비인간성(기술과학성)을 근거로 학문 탐구 분야에서 이뤄지거나, 때로는 그 기술적이고 구조적인 생리 덕분에 산업분야에서 획득됐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광학적 시각(optical vision)의 직접적이고 다양한 표현능력을 앞세워, 사진은 전통적 예술과 미적 영역을 위기로 몰아세우며 이미지계의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늦춰 잡아도 1980년대가 되면, 사진의 확고부동한 지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150년 가까이 의심의 여지없이 거의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승인됐던 사진의 객관성과 투명성은,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취약함과 재현 경로의 불투명성을 근거로 공격당했다. 또 사진이 세계의 진리와 본질, 그와 동시에 세계의 외관에 접근하는 가장 탁월한 시각적 구현물이라는 평판은, 사진술이 기계장치의 특정한 작동에 종속돼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또 역설적이지만 사진이미지는 그런 기계장치를 이용한 주체의 주관에 따라 조작 가능하다는 통찰에 직면해,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사진의 역사적 승리에 가해진 최근의 공격은 그 사용가치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한 과학과 산업 영역보다는 철학, 미학, 예술의 장(場)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현대미술가들, 사진을 자기 예술의 주요한 매체로 채택한 작가들이야말로 그 전투의 혁혁한 공헌자이다.
자, 그런데 내가 이렇게 서론을 일종의 ‘사진의 성공과 실패’라 부를만한 과정에 대한 담론으로 채운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여기서 사진의 짧은 역사를 개관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미지계의 절대 강자인 사진의 성공과 실패를 다시 생각했다. 그 상황이 사실 위와 같은 딱딱한 이론적 논의를 한 배경이다. 그 상황이란 현대미술을 하는 젊은 작가 몇 명이 자신들의 사진 또는 영상작품으로 ‘사진 매체의 실패를 탐색’하는 전시를 꾸리는데, 내가 그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을 말한다.
실패가 곧 승리인 사진적 실천
여기 국적이 다른 작가 다섯 명이 “실패를 현대사진작업의 개념적 도약대로 삼아” 작업한 자신들의 작품을, 《실패의 승리 The Triumph of Failure》라는 기획으로 묶어 선보인다. 그런데 만약 어떤 미술작품이나 기획전시가 총체적이고 완전무결한 미적 이미지의 구현을 목표로 삼지 않고, 오히려 ‘실패’를 겨냥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 심지어 실패를 ‘승리’로 격상시키기까지 한다면? 이 경우 당신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그런 작품이나 전시가 실패의 반대어인 ‘성공’에 냉소를 던질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라 예단한다. 또는 좀 더 깊게 생각해, 그 작품이나 전시의 내용이 ‘성공의 아이러니’나 ‘세속적 성공의 어두운 이면’을 담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리라. 솔직히 말해서 나도 처음 《실패의 승리》기획전에 대한 자료를 접했을 때, 그와 같이 생각했다.
《실패의 승리》는 언급했듯 국적은 한국, 영국, 짐바브웨, 독일로 다양하지만 영국 런던에서 함께 공부한 경험이 있는 다섯 작가, 즉 마틴 바델(Martin Bardell), 샘 홀든(Sam Holden), 테스 허렐(Tess Hurrell), 요한 클라인(Jochen Klein), 정희승이 한국에서 처음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사진 영상전시이다. 애초 다른 작가들과 영국에서 같이 공부하고, 이 전시의 내용을 기획한 한국작가 정희승에 따르면 “이 전시에 참여하는 다섯 작가는 충실한 재현적 매체로 인식돼온 사진의 실패, 혹은 한계에 주목하고 그것을 매체의 본질로 인식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요컨대 이들은 공통적으로 사진 영상 매체를 주요 창작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그 매체의 탁월함이나 성공적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실패나 한계를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다섯 명의 작가들이 깨달은 바로는, 그 부정적 측면이야말로 사진 매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우리가 좀 전에 제목만 듣고 상상했던 것이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닐지라도 조금 핵심에서 비껴간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전시의 작가들은 일상적 삶의 성공과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기보다는, 매체 내재적이거나 예술 내재적인 개념의 차원에서 ‘실패의 긍정성’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이 ‘실패’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사진이 현실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과정으로서 면밀히 분석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진술에 의거해서, 《실패의 승리》전에 접근하는 키워드는 ‘분석의 과정으로서 실패’라고 정의한다. 여기 작가들은 단지 일부러 엇나갈 의도에서 ―사실 현대미술의 다수 냉소적인 작품들이 그런 의도에서 탄생하지만― 성공적인 사진이 아닌, 미학적으로 실패한 사진을 찍거나 사진 일반에 얽힌 스캔들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이들은 명품매장의 럭셔리 상품처럼 하나의 매끈한 아트 오브제로 제시되는 현대사진, 또는 그런 사진작품이 어떠한 균열도 문제도 없다는 듯이 현실을 미적으로 재현하고 감상자에게 수용되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의식적으로 피하려 한다. 그 의식적 회피가 바로 《실패의 승리》전시에서 말하는 ‘실패’이며,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이 기존 사진예술/예술사진의 관례화된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실패가 사실은 ‘승리’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물론 서두에 썼듯이 이들에 앞서 사진을 주 매체로 쓰는 여러 현대 미술가들이 역사적으로 승인된 사진의 자명성, 순수성, 재현의 중립성 따위를 작업의 문제적-위반적 중심 개념으로 삼아 성공적으로 그것을 해체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제는 사진에 대한 그 문제제기 혹은 위반이 성공해서 일종의 ‘레이블 이미지(label image)’를 보유한 작가들 중 몇몇만 예를 들어보자.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는 객관적 기록물로 인정받는 신문보도사진(예컨대 이라크 전쟁 관련)이나 천연 동굴 자료사진(예컨대 스페인 마요르카 동굴)을, 작가의 상상/해석/실증적 연구에 입각해 3차원 종이 구조물/건축물로 재축조하고, 최종 결과물을 사진작품으로 제시한다. 또 카타리나 지베르딩(Katharina Sieverding)은 자신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적 초상사진이나 공적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저널리즘 사진을 마치 영화의 스크린처럼 극단적으로 확대 인화해서, 피사체가 되는 대상의 균일한 정체성을 의문시하거나 공적인 이미지의 취약한 실체를 폭로한다. 이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현대사진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는 사진 영상이 그 자체의 안정된 지위와 정체를 포기함으로써, 즉 그것을 ‘메타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내적으로 확고해지고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의 승리》에 참여하는 작가들 또한 그 대열에 있는가? 크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불가피하게 떠오른다. 이미 ‘대가(master)’라 부를 정도의 사진가들이 문제시하고 탐색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그 메타 사진의 영역을 왜, 무엇을 기대하며 이 젊은 작가들은 또 더듬는가? 그 진짜 답은 다섯 작가 각자에게 들어야겠지만, 내 입장에서 이들이 ‘사진적 실패’를 모험하는 것은 여전히 사진 영상작업 내부에 전인미답 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또 사진 영상 매체를 통해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여러 새롭고 미완의 감각적/지적 경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실패의 승리》에서 ‘실패’는 많은 계기들을 ―그것이 쓸모 있거나 쓸모없거나, 성공적이거나 실패할 확률이 높거나, 몽상적이거나 실제적이거나 상관없이― 시간 속에서 생성시키고 실행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작품들: 마틴, 샘, 요한, 테스, 희승의 경우
지나치게 단언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실패의 승리》 참여 작가 모두의 작품에는, 문제가 아름답게 봉합된 현실이나 카메라로 그렇게 보이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을 택하는 대신 그 봉합된 곳을 일부러 드러내는 분석적 태도와 방법론이 내장돼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사진 또는 영상이미지가 추하거나, 현학적인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사회비판적 메시지로 그득한 것은 또 전혀 아니다. 그 반대로 이들의 작품은 대체로 정연한 조형성을 바탕으로 하고, 시적 언어처럼 간명함과 정서적 침묵을 시각화하고 있다. 또한, 작품이 직설적으로 현실사회를 논평하기보다는, 작가가 세팅해 놓은 모호한 문맥의 사진 영상이미지를 통해 감상자가 포괄적인 담론을 시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열린 구조의 성향이 강하다. 이를 각 작가의 대표작을 들여다보면서 논해보자.
먼저 마틴의 <리허설>은 실제 배우들을 기용해, 연극 무대 혹은 촬영 세트처럼 꾸민 공간에서 특정 상황을 연기하도록 하고, 그것을 ‘장면 사진’으로 찍은 시리즈이다. 이 사진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가벽의 노출, 등장인물들의 경직된 시선과 자세, 용도를 알 수 없는 소품들의 배치이다. 예컨대 시리즈 중 하나인 <The Rehearsal>을 보면 합판과 각목으로 어설프게 만든 가벽 뒷부분이 사진 전면에 노출돼 있고, 가벽과 가벽 사이에 어정쩡한 포즈로 서류뭉치를 든 한 여성의 정지된 모습이 보이며, 사진 오른편으로는 밧줄이 의미심장하게 늘어뜨려져 있다. 마치 연극 무대 뒤편에서 공연이 이뤄지는 무대 쪽을 훔쳐보듯 찍은 이 사진을, 사실 감상자 입장에서는 그 자체 가시성의 무대로 보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즉 우리는 현실의 무대 뒤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작가 마틴이 사진작업을 위해 인위적으로 연출한 사건의 무대 앞을 보는 것인가? 답은 아마 우리가 둘 다를 본다는 것일 텐데, 이 지점에 마틴 사진의 특수한 역할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사진은 현실 속의 인위성, 또 반대로 인위적 상황 속의 리얼리티를 우리의 감각이 구분하고 다르게 지각하도록 이끄는 스위치 역할을 한다.
샘의 경우는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에 주력한다. 그의 영상은 <70 Still Frames and 5 Minutes 50 Seconds of Video>와 <Focus>로 대별된다. 기술적으로 설명하면, 전자는 스틸 카메라와 무비 카메라를 동시에 써서 한 대상(인물)의 정지이미지와 움직이는 이미지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고, 후자는 세 대의 무비 카메라로 세 명의 인물을 점차 카메라의 초점을 맞춰가면서 촬영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정보만으로도 우리는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대략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계장치 카메라의 재현이 피사체가 된 대상을 완벽히 동일하고 실체 그 자체로서 옮겨놓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사진 영상은 3차원 공간의 피와 살과 내면을 가진 존재를, 2차원 필름이미지 혹은 비물질 데이터로 위치 이동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상이미지는 샘의 <70 Still Frames and 5 Minutes 50 Seconds of Video>에서 보듯이 재현의 기제에 따라 한 인물을 70개의 스틸 컷으로 바꿀 수도 있고, 5분 50초짜리 운동이미지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영상은 <Focus>에서처럼, 한 개인을 익명화할 수도 있고 이미지로만 특화시킬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자신만의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세 명의 인물들을 초점이 흐린 영상 속에서 익명적으로 시각화하고, 동시에 반대로 점차 카메라의 초점을 맞춰 정확한 인물이미지를 제공하면서 그 개인사적 차이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는 양상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의 작품과 테스의 작품은 《실패의 승리》전에서 가장 위트에 넘치며, 사진의 작위성이 명시적으로 강조된 사진들로 보인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두 작가의 작품들이 위트에 넘치는 것은 바로 이들 사진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그리고 테스는 각자의 작업에서 결과물로서 사진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속 내용(피사체)을 만들어 촬영한다.
우선 요한의 경우를 보면, 일견 그의 사진들은 우주의 신비와 자연의 위대함을 담아낸 풍경사진으로 비친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금세 그 장엄한 풍경들이 알루미늄 포일, 솜, 천, 종이 따위를 재료로 써서 책상 위에 만들어놓은 일종의 ‘풍경의 미니어처’임을 알 수 있다.(시리즈의 제목이 <Table-top>이다.) 그렇게 감상자가 쉽게 눈치챌 수 있도록 작가가 풍경을 만들고, 촬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일종의 재미로 이런 조악한 풍경을 만들어 찍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점은 작가가 자기 사진의 캡션/제목으로 밝히고 있는 정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요한의 <Untitled 1(Moonrise, Hemandez, New Mexico, 1941), 2008>을 보자마자 사진사에 정통한 이들은 곧바로 앤젤 아담스(Ansel Adams)가 1941년에 찍은 뉴멕시코 풍경(요한의 제목 속 괄호 안에 표기된)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요한은 사진의 즉물주의를 표방한 F64의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아담스의 스트레이트 포토를 노골적으로 차용하면서, 그러나 사진의 즉물적 피사체를 진짜 뉴멕시코의 대자연이 아니라 테이블 위의 귀여운 가짜 자연으로 대치시켜서, ‘대상 그 자체’를 목표하는 즉물주의 사진의 신화를 깨트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진이 세계를, 그 본질을 고스란히 재현한다.’고 하는 사진계의 오래된 마법을 탈 주술화하는 것인 동시에, 사진사의 거장들이 만들어놓은 근엄하고 건조한 예술사진 문법에 젊고 발랄한 마술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테스의 <Chaology> 연작은 애초 작가가 “사진에 기록된 폭발장면의 시각적 힘에 매료되어” 작업을 시작한 것이라 한다. 이를테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사진을 지금 우리가 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테스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가가 예컨대 폭탄의 ‘폭발장면’ 자체의 힘이 아니라 그 장면이 기록된 사진의 ‘시각적 힘’에 매료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엄밀히 말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재현되는 메커니즘과 수용자에게 작용하는 재현 효과에 대한 매료다. 아마도 그 때문에 테스는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폭발장면이 아니라, 솜과 베이비파우더를 이용해 소박하게 폭발의 순간을 시뮬레이션 한 사진을 만들었을 것이다. 검은색 배경 위로 아담해 보이는(심지어 앙증맞은) 흰색 솜뭉치가 실에 매달려 있고, 그 밑에 모호한 성분의 백색 가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있는 사진. 테스의 이 ‘재난 아닌 재난 사진’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과거(또는 현재 진행형)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농담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사건들이 사진의 형태로 포착되고, 그 사진이 시간이 지나 역사적 이미지로 굳어지면서 같이 경화되는 우리 내면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과도한 시각적 효과에 동반하는 폭력 불감증 같은 것. 이것이 아마 작가가 처음 매료된 ‘폭발장면의 시각적 힘’에 대한 진지한, 그러나 매우 재기 발랄한 사진적 실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희승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현재까지 그녀의 사진은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진가들이 ‘초상사진’을 찍어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정희승의 인물사진은 별 변별력이 없게 느껴진다. 그런데 <The Reading>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가의 사진연작 속 인물은 실제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라는 데 흥미로운 차이가 만들어진다. 인물이 실제도, 허구도 아니라니? 정희승의 인물은 현실적으로는 직업이 배우인 사람들인데, 그녀가 포착하는 그들은 이제 막 배역을 맡아 대본을 읽으며 드라마 속 허구적 인물로 변화해가는 순간의 남/녀이다. 그러니 이 인물들은 ‘배우 모모 씨’도 아니고, 대본에 적힌 ‘(가상의) 아무개’도 아닌 것이다. 혹은 둘 다이기도 하다. 사진은 이 중간자적 존재, 또는 비결정적 주체를 피사체가 된 그/녀의 어디를 향하는지 알기 힘든 시선, 섬세하게 일그러지거나 넋 나간 표정, 대본을 든 손의 예민한 자태나 어둠을 향해 곧추선 목덜미의 포즈 등을 통해 암시한다. 흔히 사람들은 극히 잘 찍은 초상사진에는 ‘대상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 사진이 단순히 기계장치로 재현된 인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영매나 주술사로서의 사진가가 피사체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현상한 이미지이기라도 한 듯이. 초상사진에 대한 그런 식의 평가가 사진 초창기 회화예술에 대한 사진의 콤플렉스에서 유래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만약 그렇다면 정희승의 <The Reading> 속 인물의 영혼은 어떻게 현상될 수 있는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현실의 한 인물로, 아니면 바야흐로 그 배우가 감정이입상태에 들어간 연극적 페르소나로? 정희승의 사진은 그것이 결정 불가능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진, 특히 예술사진에 투사하는 ‘기계적 재현을 넘어선 주관의 발현’이라는 기대(혹은 평가기준)가 미적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는 점을 일깨운다. 그녀가 최근에 19세기 광학장치인 스테레오 스코프(stereoscope)를 되살려, 인물초상사진을 찍고 거기에 <Ghost>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 또한 어쩌면 사진 발명의 초창기에 포착된 인간의 사진적 얼굴을 다시 읽어보기 위함일지 모른다. 과연 거기에 ‘영혼’이라 할 만한 것이 재현되는지, 아니면 불완전한 재현도구가 만들어낸 ‘시각적 표면’만이 있는지를 다시 읽어보는, 시대착오적 실천으로서.
《실패의 승리》를 위한 두 인용
나는 이 글의 모토로 바르트(Roland Barthes)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기호학자로서 대상에 대한 ‘다시 읽기(re-reading)’야말로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방법’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대상을 지각하고 이데올로기에 훈육된 인식으로 세계를 다시 읽지 않는 것은, 그만큼 우리 ‘안다고 가정된 주체’가 대상 또는 세계를 오만하게 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오만은 과거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겠지만, 동시에 그 오만이 미래의 실패를 불러온다.
왜냐하면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실패와 성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강점을 알게 되는 곳, 그곳은 그의 실패에서이다. (...) 우리는 그 실패들 속에서 온갖 부활의 술책들을 배우고 용의 피로 목욕하듯이 수치심 속에 목욕한다. (...) 특별하고 끔찍한 종류의 거주, 그것이 모든 강점의 대가(代價)다. 그것은 탱크 속에서의 삶이다. 그 안에 들어가 거주하면, 우리는 어리석고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고, 모든 구덩이에 빠지고, 모든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며, 오물을 헤집고 대지를 더럽힌다. 그러나 오직 그처럼 더럽혀진 곳에서만 우리는 정복되기 어려운 존재다.”
1. Roland Barthes, S/Z, New York: Hill & Wang, 1977, pp. 15-16. “Those who fail to re-read are obliged to read the same story everywhere”
2. Walter Benjamin, “Denkbilder”, 최성만 역, 『발터 벤야민 선집 1-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서울: 길, 2007, pp. 172-173. |